
'취업'으로서의 결혼, 비즈니스가 된 일상
고학력이지만 파견 사원에서도 해고된 '미쿠리'와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초식남 '히라마사'. 두 사람은 사랑이 아닌 '필요'에 의해 계약 결혼을 선택합니다. 아내는 가사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받고, 남편은 고용주가 되어 안락한 가정을 구매하는 이 기묘한 관계는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를 넘어섭니다. 영화는 '사랑하니까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치부되던 가사 노동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일상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도망쳐도 괜찮아", 헝가리 속담이 주는 지혜
제목이자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인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헝가리 속담입니다. 이는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무모하게 버티다 부서지기보다, 일단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후퇴하는 것이 얼마나 '전략적이고 용기 있는 선택'인지를 말해줍니다. 사회가 정한 '정상적인 삶'의 기준에서 잠시 도망쳐 나와 자신들만의 새로운 규칙(계약 결혼)을 만든 주인공들의 모습은, 정답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서툰 진심이 맞물려가는 시간
시스템으로 시작된 관계였기에, 두 사람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부부보다 더 많이 대화하고 분석합니다. 감정에 휩쓸리기보다 '재계약'과 '공동 경영'이라는 틀 안에서 서로의 선을 존중하고 조율해 나가는 과정은 현대적인 관계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누군가에게 선택받고 싶다"는 미쿠리의 절실한 바람과 "자신의 평온을 지키고 싶다"는 히라마사의 방어 기제가 만나 서로의 빈틈을 채워가는 과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서툰 진심이 가진 힘을 믿게 합니다.
[나의 매김] - '나'라는 존재를 지켜내는 가장 현명한 후퇴
이 작품을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인생의 비상구'를 찾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끝까지 버티는 것만이 미덕이라 배우지만, 이 영화는 "도망쳐 도착한 곳이 꼭 낙원은 아닐지라도,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줍니다.
특히 가사 노동을 '사랑'이라는 이름의 무급 봉사가 아닌 정당한 '노동'으로 규정하는 시선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던 우리들의 관성을 통쾌하게 깨뜨립니다. 결국 이 작품은 결혼이나 직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나답게 생존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라 매김하고 싶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잠시 도망쳐 이들의 다정한 계약 관계를 들여다보시길 권합니다. 그 비겁하지 않은 도망 끝에, 분명 당신만을 위한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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